문하연 시민기자의 ‘사연이 있는 클래식’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비크 <제2편>

[인천투데이 문하연 시민기자] 1854년 2월 27일, 사육제가 열리는 뒤셀도르프에서 실내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다. 그는 울고 있다. 다리를 건너려면 통행세를 내야했기에 그는 동전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인다.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왔던 길을 다시 가려다 돌아서서 다리를 지키는 사람에게 비단 손수건을 내민다. 그런 다음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더니 얼마 후 라인강 난간을 넘어 투신한다. 그는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이다.

그는 인근을 지나던 나룻배에 의해 구조된다. 온몸에 물을 뚝뚝 흘리며 사람들에 둘러싸여 집으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자진해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2년을 버티다 집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 향년 46세였다.

로베르트 슈만.

든든한 지원자 아버지의 죽음

로베르트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슈만은 작가이자 번역가, 편집ㆍ서점ㆍ출판업자로 자수성가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외과의사의 딸인 요안나 크리스티아네다. 로베르트는 독일 작센 주 츠비카우에서 누나 한 명과 형 세 명 아래 막내로 태어났다. 생활이 넉넉하고 교육열이 높은 부모 덕분에 시립 라틴어학교에 다니며 인문학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서점에서 많은 책을 읽으며 자랐다.

로베르트는 7세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금세 작곡까지하는 재능을 발휘했다. 12세 무렵 아버지로부터 비싼 피아노를 선물 받은 로베르트는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을 넘어 베토벤 교향곡을 피아노연탄 곡으로 편곡해 연주했으며, 동네에서 악기 좀 한다는 아이들을 모아팀을 만들어 오페라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선생이었던 지역 오르가니스트 쿤치는 그의 재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를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에게 보낼 생각을 했으나, 베버가 사망해 가지 못하고 독학으로 공부해야 했다.

14세에 그는 아버지가 출판한 책에 글을 실었고 이어 소설ㆍ희곡ㆍ시를 썼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하지만 시련이 닥친다. 1825년, 열네 살 위인 누나가 우울증으로 자살한다.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 10개월 후 정신질환을 보인 아버지까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를 물심양면 지원한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보다 보다 현실적이었던 어머니는 밥벌이가 될 만한 직업을 구해야 한다며 그를 라이프치히대학교 법대에 가게 한다.

그저 귀여운 동생 클라라 비크

음악에 열정이 가득했던 그는 2년을 버티다가 당시 그곳 최고의 피아노 교수인 프리드리히 비크를 찾아간다. 로베르트가 음악을 해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재능이 풍부한지 걱정하는 그의 어머니 편지에 프리드리히는 “그의 재능과 상상력을 살려서 반드시 3년 안에 현존하는 대(大)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으로 양성하겠다” 라고 답장을 보낸다.

로베르트는 1930년에 프리드리히의 집으로 들어가 같이 지내며 음악수업을 받는다. 그곳에는 그의 딸 클라라 비크가 있었고 로베르트는 클라라와 피아노를 연습하고 이론을 공부했다. 로베르트는 때때로 클라라의 두 남동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한 발로 오래 버티기 같은 게임을 해 상을 주고 귀신 분장을 하고 귀신놀이를 했다. 근엄하던 클라라의 집에 웃음이 피어났다. 당시 로베르트의 일기에는 자신이 거짓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꾸며내면 순진한 클라라는 그대로 믿고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고 쓰여 있다. 잘생기고 피아노 잘 치는 20세 로베르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11세 클라라는 그저 귀여운 동생이었다.

피아니스트 꿈 접고 작곡가ㆍ음악평론가로

피아노 신동인 클라라는 연주여행으로 늘 바빴다. 클라라가 비크와 연주여행을 떠나면 로베르트는 혼자 남아 피아노 연습을 맹렬히 했다. 클라라 옆에서 자극받을 수밖에 없었던 로베르트는 무리하게 연습하다가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을 심하게 다친다. 이 때문에 피아니스트 꿈을 접어야했던 슈만은 작곡가와 음악평론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작곡에 몰입한다.

클라라가 연주여행을 하는 동안 로베르트는 곡을 만들었고, 집으로 돌아온 클라라는 기대에 차서 그의 곡을 연주했다. 아홉 살 차에도 불구하고 둘은 음악적으로 교감했고 음악 안에서 하나가 됐다. 그렇게 만든 곡 중 하나가 ‘빠삐용(나비)’이다. “나는 클라라가 오늘처럼 연주한 적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곡을 완전히 장악했고 아름답게 연주했다.”(로베르트의 일기)

“손을 다쳤기 때문에 특히 이곳 비엔나에서 가끔씩 불행함을 느낍니다. (중략) 상황이 너무나 끔찍하고 이미 나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어요. 이제 클라라 당신이 내 오른손이기에 그 어떤 나쁜 일도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게 자신을 잘 돌봐야합니다. 클라라 당신의 연주로 인해 내가 보냈던 행복한 시간들을 종종 생각하고 있어요.”(로베르트가 클라라에게 쓴 편지)

1834년 로베르트는 <음악신보>라는 음악저널을 창간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음악저널을 위한 ‘다비드 동맹’이란 무리가 등장하는데, 실존 인물과 가상 인물들이 혼재돼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음악을 비평하고자 할 때 로베르트는 ‘플로레스탄’이란 이름으로 대담하고 충동적인 면을 이야기하고 또, ‘오비제우스’란 이름으로 몽환적이고 부드러운 측면을 말하며, ‘마스터 라로’라는 이름으로 성숙하고 반성하는 면을 설명한다. 마치 여러 명이 둘러앉아 한 곡을 비평하는 것 같지만, 사실 로베르트 혼자서 1인 3역, 혹은 그 이상을 하는 형식이다. 혹자는 로베르트의 정신분열이 이미 이 시기에 이런 방식으로 표출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의 폭넓은 지식과 유연한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이 잡지 이전에도 로베르트는 다른 음악 잡지에 쇼팽의 작품 ‘돈 조반니 변주곡’을 독일에 소개하면서 “여러분, 모자를 벗으십시오. 천재입니다”라는 감동적인 글을 싣기도 했다. 이렇듯 <음악신보>는 로베르트의 필력에 힘입어 유럽 전역에 엄청난 파급을 가져왔다. 그 무렵 로베르트는 빈을 방문해 평소에 존경하는 슈베르트 묘지에 참배하고 그의 형 집을 방문했는데, 형은 로베르트에게 슈베르트가 남긴 악보들을 보여줬다.

“거기 놓여있는 악보들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뻐서 온몸이 떨렸다. 특히 교향곡의 스코어를 보았는데 그것은 한 번도 연주되지 않은 것이었다.”

로베르트가 발견한 것은 슈베르트 교향곡 9번 C장조 그레이트 D944이다. 로베르트는 이 악보를 게반트하우스 지휘자 멘델스존에게 보여줬고, 멘델스존은 1839년이 곡을 초연한다. 먼지 속에 있다가 사라질 악보가 로베르트 덕분에 살아났다. 멘델스존이 바흐를 부활시켰다면, 로베르트는 슈베르트 교향곡을 살려냈다. 로베르트는 <음악신보>에 이 곡을 실었고, <음악신보>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비평지로 입지를 굳혔으며, 이 음악저널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비크.

프리드리히의 반대에도 클라라와 결혼

로베르트와 클라라가 한 집에 머문 기간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이후에는 따로 살면서 왕래했다. 클라라의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둘은 서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클라라를 만나지 못했던 로베르트는 꿀에 설탕을 탄 것 같은, 세상 둘도 없이 달달한 편지를 보내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그립고 사랑스러운 클라라. (중략) 사실은 부탁이 있습니다. 우리 두 명을 서로 연결하고 또 생각하게 하는 전령 같은 것이 지금은 없으니까 내가 한 가지 궁리를 해내었습니다. 나는 내일 11시를 치는 것과 동시에 쇼팽의 변주곡 중에서 아다지오를 치면서 뜨겁게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에게 마음을 집중시키렵니다. 부탁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만날 수 있게 당신도 나와 똑같은 일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신이 만나는 장소는 필경 토마스교회 옆문 근처일 겁니다. (중략) 혹시 클라라가 이것을 지켜주지 않으면 내일 11시에 실한 줄이 끊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나예요. 마음속으로부터 하는 말입니다.”

클라라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답장을 보낸다.

“(…) 당신이, 당신이 오시지 않으니까 재미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부탁하신 대로 저는 내일 11시에 토마스교회 옆문으로 가겠습니다.(생략)”

영혼이 만나는 약속이라니. 클라라의 답장이 더 근사하다. 11시에 아다지오를 치겠다고 답하지 않고 토마스교회 옆문으로 가겠단다. 내 가슴이 콩닥거린다.

프리드리히의 반대에도 클라라와 로베르트는 결혼했다. 결혼 전날, 로베르트는 클라라에게 선물을 전하는데 ‘미르테의 꽃’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가곡집이다. 이 가곡집에는 ‘연꽃’, ‘그대는 꽃과 같이’, ‘호두나무’와 같은 주옥같은 작품들이 들어있다.

비교 불가한 명성을 얻지만…

로베르트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갔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결혼 1주년 즈음 그는 작심하고 ‘D단조 교향곡’을 만들어 첫 연주를 라이프치히에서 했는데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당시 그곳을 방문한 리스트가 공연 소식을 알고 게스트를 자청한 것이다. 리스트는 가는 곳마다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스타였다. 슈만 부부는 리스트의 호의를 감사히 받았다. 교향곡 초연에 앞서 리스트와 클라라가 함께 무대에 올라 ‘헥사메론 2중주곡’을 연주했다. 이 압도적이고 화려한 곡에 청중은 열광했지만 이어지는 심오한 교향곡에는 무감각했다. 이에 로베르트는 크게 실망해 이 곡을 서랍 깊숙이 넣어뒀다가 10년 후에야 다시 손질해 꺼내놓는다.

로베르트는 수준 높은 곳을 엄청 많이 쏟아낸다. 쇼팽이 피아노곡에 치우치고, 말러가 교향곡에 치우친 것에 비하면 슈만은 피아노 소나타, 실내악, 가곡, 교향곡 전반에 걸쳐 곡을 만들었다. 모차르트와 더불어 거의 비교불가라 할 수 있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뒤셀도르프에서 관현악과 합창단 지휘자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호재인줄 알았던 이 제안은 악재가 되고 만다. 처음엔 모든 게 순조로웠지만, 점차 단원들과 슈만 사이에 마찰이 생겨났고 예민하고 불안정한 슈만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점점 정신적으로 악화일로를 걷는다.

그러던 어느 날, 클라라와 매우 친한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요하임의 소개로 신출내기 음악가가 슈만의 집을 방문한다. 베토벤-슈베르트-슈만의 계보를 이을 차세대 음악가이자 일평생 한 여인의 자기장을 도저히 벗어나지 못했던 그가.

“1853년 어느 날 정오에 벨이 울렸다. 흔히 아이들이 그러하듯 나는 밖으로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거기에 한 청년이, 긴 금발을 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청년이 서 있었다. (중략)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브람스였다.”(클라라의 장녀 마리의 회고)

[참고서적]
클라라 슈만 평전.(낸시 B 라이히 지음, 강자연ㆍ하인혜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펴냄)
슈만, 내면의 풍경(미셀 슈나이더 지음, 김남주 옮김, 그 책 펴냄)
슈만과 클라라(베톨트 리츠만 지음, 임선희 옮김, 우석 펴냄)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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